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은 수십 년 동안 전 세계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 그의 시각과 그의 무한한 상상력의 스펙트럼을 통과해 보여주는 세계의 끝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채롭다. 그것이 소설이든 수필이든 그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가끔은 질적으로 후퇴한 듯 한 작품이 선보여도 그의 충성스런 독자들에 의해 소비되고 읽힌다. 그의 팬들에게 그의 작품은 더 이상 당대 여타 문학가들과 비교해 ‘완성도가 높은가, 낮은가’를 논할 대상이 아니다. 그저 그의 작품이 좋은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루키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이를 만들어낸 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작가주의는 오디오에서도 있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몇몇 존재하는 히어로들에 의해서 안간힘을 다해 버텨오고 있다. 마크 레빈슨, 윌리엄 이글스톤, 댄 다고스티노의 존재가 조금은 약해졌을지 몰라도 여전히 시대의 우상으로 기억되긴 하지만 또 새로운 세대가 그 뒤를 잇고 있다. 그러나 그 예전만큼은 아니다. 디지털의 세계는 더해서 작가주의는 이제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누구나 그 품질만 좋고 스펙만 최신을 달리면 인정해주고 소비하며 그리곤 시대가 지나면 미련 없이 버린다. 작자 중심에서 작품 중심으로 변했다. 기능 지상주의와 원칙 없는 무분별한 소비는 작가주의가 그 가치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하이엔드의 가치와 즐거움을 반감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프라이메어 또한 위 메이커들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바이오그래피를 기반으로 흔치않은 작가주의를 표출한 메이커다. 1980년대에 보 크리스텐센(Bo Christensen)이라는 걸출한 엔지니어에 의해 탄생한 프라이메어는 미국이나 영국권이 아닌 북유럽 스웨덴에서 그 역사를 시작한다. 향후 수십 년간 북구를 대표하는 메이커가 될 줄을 꿈에도 몰랐겠지만 보 크리스텐센을 위시로 미국 시장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는 여러 엔지니어가 프라이메어의 바이오그래피 안에서 등장하고 사라진다. ‘Cost-no-object' 철학으로 시작한 초창기 이후 보 크리스텐센이 자리를 떠나고 90년대엔 스레숄드와 패스랩스의 엔지니어로 기억되는 마이크 블라델리우스가 가세하기도 했다. 이후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10, 20, 30시리즈로의 재편 등 프라이메어의 스토리는 마치 한 작가의 일대기를 읽어나가는 듯 여러 주인공과 조연, 시대 상황의 변화와 당시 영미권과 유럽의 하이파이 시장을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비춰준다. 보 크리스텐센은 현재 아르토라(Atrora)를 운영하고 있고 마이크 블라델리우스 또한 현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블라델리우스(Bladelius)를 설립했으나 모두 프라이메어 출신임을 알고 나면 프라이메어는 북구 하이파이의 산파라는 의견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프라이메어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새로운 바이오그래피를 써나가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특히 디지털 분야에서의 약진이 두드러지는데 I32 인티앰프, 32 프리와 60 프리, NP30 네트워크 플레이어, BD32 유니버설 플레이어에서부터 시작해 DAC 도 새로운 라인업이 샘솟듯 출시 러시를 달리고 있다. 그리고 DAC30 이 그 핵심에 서있다.
프라이메어의 라인업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디지털 관련 기기들에 사용되는 DAC 칩셋은 총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버브라운 BB1792 로 I22, I32 등 대부분의 기기들에 범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크리스탈 CS4398 로서 플래그십 프리앰프인 PRE60 과 단 하나의 DAC 라인업인 DAC30 에 사용하고 있다. 샘플링 레이트 컨버터는 SRC4392를 사용했으며 가능한 깨끗한 시그널을 전송하기 위해 지터 제어에도 상당히 높은 엔지니어링이 적용된 모습이다.
아날로그 출력단을 보면 오랫동안 갈고 닦아온 프라이메어의 기술이 그대로 나타난다. 버브라운의 OPA2134를 사용해 풀 밸런스 설계의 아날로그 출력단을 설계했으며 이 외에 WIMA, EPCOS 폴리프로필렌 필터 커패시터, 커다란 MELF 저항 등이 사용되고 있다. 싱글 엔디드 출력단의 증폭은 MOSFET 트랜지스터를 사용해 밸런스 출력과 싱글 엔디드 출력단 설계를 달리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지털 DAC 보드에는 최저 인덕턴스를 가지는 산요 OS-com 커패시터를 적극 투입하고 있으며 뮤트(Mute) 설계는 릴레이로 컨트롤하는 방식으로 하이파이 기기에 최적화된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설계상의 세밀한 부품 안배과 서킷 디자인은 노이즈와 THD 등 하이파이 기기에서 가장 기본적인 측정수치를 최소화시켰다.
특히 모든 하이파이 컴포넌트의 심장과 같은 전원부를 좀 더 살펴보면 DAC30 의 전원부는 별도의 섀시에 넣어 설계했어도 될 만큼 강력하다. 우선 고성능 R 코어 크랜스포머를 중심으로 아날로그단과 디지털 써킷에 별도로 전원을 공급하고 있다. 아날로그단을 살펴보면 작은 ESR 값을 갖는 여러 개의 커패시터를 사용해 무려 74000uF 용량의 넉넉한 커패시터 뱅크가 설계되어 있다. 또한 LM317/337 레귤레이터에 의해 최초 레귤레이션 과정을 거친다. 디지털 섹션의 파워 서플라이 역시 낮은 ESR 값을 가지는 여러 개의 커패시터를 투입해 최종적으로 48800uF 용량의 커패시터 뱅크를 구성했으며 리니어 테크놀로지에 의해 LDO5A 고속 레귤레이션 과정을 거친다.
입력단을 살펴보면 풀 사이즈 DAC인만큼 널찍한 후면 패널에 디지털 관련 입/출력 단자와 아날로그 출력단, 전원 인렛 등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다. 좌측에는 RCA 와 XLR 아날로그 출력단이 각각 마련되어 있으며 디지털 입력단은 IN1부터 IN5까지 총 5개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IN1부터 IN3까지는 코엑셜과 옵티컬이 쌍으로 각각 세 조씩 마련되어 있으며 IN4 는 AES/EBU 그리고 마지막으로 IN5 는 USB 입력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USB 입력단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USB 입력 트랜시버인 XMOS 칩셋을 사용했는데 이는 XMOS 와 스웨덴의 프라이메어가 협력하에 커스터마이징한 것으로 프라이메어에 적용해 최상의 퍼모먼스를 얻을 수 있도록 XMOS 펌웨어를 최적화시킨 것이다. 당연히 PCM 24bit/192kHz 에 대응하는 USB 2.0 버전으로 완성되었다.
처음 접한 프라이메어 DAC30 은 프라이메어 30 시리즈의 그것과 동일하게 묵직한 섀시를 자랑한다. 두터운 전면 패널과 함께 패널 두께만큼의 간극을 두고 격리되는 몸통은 예나 지금이나 프라이메의 디자인의 전매특허답다. 전면 좌측으로는 스탠바이 스위치가 자리잡고 있으며 중앙으로는 1번부터 5번까지 디지털 입력단, 그리고 그 아래로는 입력 샘플링 레이트는 표기하는 DIM 라이트가 자리한다.
그리고 우측으로는 리모트 센서와 입력 셀렉터가 보인다. 프라이메어의 모든 라인업에 제공되는 리모콘도 기본으로 제공된다.
플래그십 BD32 의 전원부 외 풀 밸런스 아날로그단 그리고 24bit/192kHz 에 대응하는 시러스 로직 DAC 칩셋 등을 활용한 DAC30 은 현재 프라이메어의 둘도 없는 레퍼런스 DAC이다. 미국의 그것과 달리 프라이메어는 상당히 소박하고 풋풋하며 때로는 달콤하고 멜랑콜리한 면모를 보여왔는데 수산느 아뷔엘(Susanne Abbuehl) 의 2013년 정규앨범 [The Gift] 중 ‘This and My Heart'(24bit/88.2kHz)를 들어보면 단박에 DAC30 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다. 마치 시를 읊는 듯 관조적 보이스에 공간을 누비는 매튜 미셸(Matthieu Michel)의 플루겔 혼, 올라비(Olavi Louhivuori)의 퍼커션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안개 낀 산기슭을 거니는 듯 한 풍광이 떠오른다. 최근 최신 DAC 들과 비교하면 피치는 약간 아래로 내려와 차분한 편이며 광대역에 말끔하고 반듯하게 깎아지른 듯한 표면보다는 따스한 표면 촉감이 느껴지면 촉촉한 습기가 느껴져 음악에 서서히 녹아들게 만든다. ECM 의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레코딩에 온기가 스며들어 청감상 오히려 뮤지션과의 거리가 좁혀진, 친근한 느낌을 자아낸다.
팻 매스니 유니티 그룹(Pat Metheny Unity Group)의 [Kin<-->] 앨범에서 빠른 기타 스트로크의 ‘Rise Up'(24bit/96kHz) 등을 들어보면 기타 스트로크가 부드러우면서도 두께감이 느껴진다. 얇고 밝게 날리는 소리가 아니다. 대게 프라이메어의 현재 라인업은 물론 과거의 그것들까지 망라해도 소스기기의 소리는 항상 이래왔다. 전체적으로 광대역의 쾌감보다는 음색적인 독특함이 빛나는데 약간 어둡고 차분한 고역에 중역대의 도톰한 살집이 느껴지며 저역은 깊다기보다는 담백한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느리게 질척이거나 혼탁한 중,저역이 아니라 약간 뽀얀 시야를 보여주며 하모닉스를 풍부하게 가지고 나간다. 각 악기의 존재감이 뚜렷하고 두께감이 있어 악기 고유의 텍스쳐도 잘 살아나는 편이지만 프라이메어 특유의 색깔이 드리워져 있다. 포근하고 폭신한 텍스쳐는 편안하게 레코딩 현장 속으로 청자를 밀어 넣는다.